안녕하세요. 새벽 3시의 DBFW입니다.
오늘은 저번 포스팅에 관련된 내용의 책 리뷰를 조금 남기고 제 생각을 쓰려고 합니다. 사실은 저는 책에 대해 리뷰를 한다라는 개념이 "책을 보고 내가 느낀 점 들에 대해서 쓰면 된다" 라고 평소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리뷰라는 게 어떤 매체의 활동, 체험 등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으로 감상, 비평, 논평 등을 하는 활동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제가 책을 통해서 얻은 것을 다시 재생산해서 밖으로 꺼내 보이는 게 핵심이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저번에 '에고라는 적'에 대한 책의 리뷰가 부족했습니다.
근데 오늘은 좀 책에 대해서 구성이나 내용면에서 좀 써봐야지 하고 글을 시작해보고 있습니다만 역시 제 생각 위주의 글이 나올 듯싶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책의 핵심 내용이라고 봤던 것을 중심으로 글을 이어 나가보려 합니다.
관련 링크 https://dbfw.tistory.com/35
"왜 제목을 저렇게 써놓은거야!!" 라고 하시는 분들은 이 글의 제일 마지막에 가시면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실 수도 있지만 글의 내용을 보시고 책의 주제 에고에 대해서 이해하시고 보신다면 더욱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얼마 전에 에고(Ego)라는 적을 만난 적이 있는 듯합니다. 이 책을 읽고서 이 글을 쓸려고 보니 갑자기 제 머릿속을 스쳐가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이 콩닥콩닥하네요. 그 사건이라는 것이 별게 아닐 수도 있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평소에 자주 일어나던 일이 아니고 안전에 대한 문제라 쉽게 잊히지는 않아서 제가 이 블로그에 글로 기록을 남겼습니다. 관련 글 링크는 아래에 있습니다.
'빗길과 감정, 그리고 어리석음' https://dbfw.tistory.com/9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었죠. 그래서 얼마 전에 타이어도 4개를 싹 바꿔버렸습니다. 사건을 요약하자면 저에게도 에고(Ego)라는 놈이 찾아왔고(사실은 찾아온 게 아니고 운전하고 있던 제가 에고(Ego) 그 자체였던 겁니다) 저는 에고(Ego)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운전하던 차의 중도를 다시 잡았고 제 생존 본능이 에고(Ego)를 밀어내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또 갑자기 든 생각이 생존본능과 에고(Ego)는 다른것인가? 라는것으로 한때 고민했었는데 결론은 생존본능이 에고(Ego)보다는 우위에 서있으며 언제든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한 일이 생긴다면 생존의 본능은 에고(Ego)쯤은 손쉽게 제 마음에서 잠시나마 쫓아내거나 한쪽에서 손들고 서있게 만들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해한 에고(Ego)라는 것이 위에 링크를 걸어놓은 글에서처럼 이성과 감정이라는 관계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생(生)에 대한 욕구가 약하던 강하던간에 내 앞에 칼을 들고 있는 사이코패스가 서 있다면 어떨까요?
나의 에고(Ego)라는 놈이 너무 강해서 평소에 거들먹거리든 자신감에 넘쳐흘리든 간에 일단은 도망치고 봐야 합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고 대항할만한 무기도 없는데 맞붙어봤자 나에게는 굉장히 불리한 게임이 될 것입니다. 생명이 걸린 게임에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닌 이상 모험을 걸기는 쉽지 않겠죠?
이렇게 에고(Ego)를 떨쳐낼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가 생각처럼 녹녹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고(Ego)를 달고 사는 것이죠. 마치 그게 나 자신이라고 알듯이 말이죠. 이건 1999년작 매트릭스(The Matrix)라는 영화의 주인공 네오가 기계(AI)들에 의해서 자신의 머릿속으로 밀어 넣어 만드는 상상의 세계의 네오라는 이미지가 마치 당연히 본인인 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뭐 사실 저는 이런 얘기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진짜 현재 세계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답니다.)
영화 속의 네오가 빨간약을 먹느냐 파란 약을 먹느냐는 간단할지 몰라도 그 선택의 과정은 고통이 따릅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떨쳐내려야 떨쳐낼 수가 없는 것이거든요. 표현하자면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기본 중에 기본 옵션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고통받지 않는 자가 있다면 나와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미물이라고 치부해버리는 벌레들도 먹고 살려면 먹이를 잡든지 일을 해야 합니다. 먹이를 구하려고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위험한 일도 생기고 다칠 수도 있으니 그것 또한 고통을 느낄만한 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에고(Ego)라는 적을 내나 자신으로부터 분리를 하려 한다면 평소와는 다른 스펙터클한 상황이 내 앞에 펼쳐지던가 아니면 죽을 만큼의 고통의 시간을 지나 봐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저는 위에서 얘기한 잠시 동안의 자동차 제어 불능 상태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살고 싶다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최전방에서 어떻게든 이 불쌍한 놈을 살려놔야겠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순간 뇌 속의 뉴런과 시냅스에서 빛과 같은 속도로 전기적 신호들이 번개 치듯이 머릿속을 휘저으며 "여기서 살려면 무슨 행동을 해야 하나요?"를 구글링 하듯이 검색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번 책에서 제가 잡은 키워드(Key Word)는 '겸손'입니다. 정말 책을 보다보면 겸손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럼 겸손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어떻게 될까요?
책에서 제가 느낀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말은 "겸손하라" 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면 많은 것들을 할 수가 있더군요. 그중에서 겸손을 통한 얻을 수 있는 부분은 배움입니다. 배움을 얻으려면 내 안의 에고를 통제하여야 합니다. 통제할 수 있다는 건 인정과 수용이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여담이지만 정말 이 글을 쓰다 보니까 책에서만 알고 있었던 게 갑자기 연결되면서 뭔가 하나 배운 거 같습니다.(새벽 5:28분이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 정말 깨닫게 됩니다)
이건 주제에서 좀 벗어난 얘기지만 제가 책에서 본 것들을 쓰다보니 다시 느끼게 된 게 얼마 전에 일적인 관계로 사람과 얽힌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너무 화 만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고통스러워하다보니 문득 의문이 하나 들었습니다.
"왜 나는 다른 사람이 나에대해 지적한 것에 대해 수용하지 못하는가?"
사실은 이 주제에 대해서 글도 써보려고 했습니다. 근데 답을 못 찾겠더라고요. 왜 그런지를 몰랐습니다. 근데 지금 보니 저는 인정을 못했던 거네요. 인정을 못하니 수용도 안되는 거였습니다. 남이 나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는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근데 그 지적이 옳은 것이라면 본인도 알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이 듣기가 싫은 겁니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닌 겁니다.
예로 "엄마가 그만 먹으랬지! 살 뺀다며!!"라고 들어도 알고는 있고 나도 노력하는데 에고(Ego)는 날 가만두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너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만하라고 해"라고 부추기며 결국에 오늘도 엄마와 싸우게 되는 겁니다.
사실은 모르는 겁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뭔가를 습득하고 배우려면 수용과 인정이 선행이 돼야 하는 겁니다. 나는 모른다.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모르고 잘못된 걸 인정하면 새로움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되며 더 이상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겸손에 대한 얘기 하다가 잠시 다른 길로 빠져서 죄송하지만 결국엔 이 책의 내용에 관한 핵심이라고 생각한 부분이며 순서의 약간 뒤바뀜이 있었네요. 다시 겸손이라는 주제로 돌아가서 겸손에 대해서 찾아보니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가 있는 것. 또는, 그 태도.
라고 겸손이라는 정의가 있더군요. 혹시 겸손이라는 의미가 다른 게 또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봤습니다. 여기서 제가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요. 그것은 겸손은 자신을 낮추던지 어떤 명확한 관점과 존경을 갖던지 간에 결국에는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에서 자꾸 겸손에 대해서 말은 하는데 저도 알고는 있지만 겸손이라는 것을 행하기는 참으로 힘들더라고요. 일단 나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내 앞에 있는 사람, 사물, 장소 등등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나보다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근데 다른 사람을 나보다 높게 생각한다는 게 사실은 쉽지가 않은 일이거든요.
저는 이것이 에고(Ego)가 겸손보다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에고(Ego)를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지요? 그냥 이건 의식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나 입니다. 에고(Ego) 그 자체가 나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의 나를 어떻게 생각해야 둘로 나눠서 볼 수 있을까요? 그러고 어떻게 나를 다른 이 보다 내세우지 않고 존중할 수 있는 것일까요?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질문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제 자신 자체가 에고(Ego)를 인정하지 못하니 수용이 안 되는 것이고 수용이 안되니 거부하고 이해가 안 되는 아니 안 하려고 하는 현상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일단은 책 읽기를 멈추고 이틀 정도를 에고(Ego)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사실 남들보다 겸손에 대해서는 몸에 익혀 잘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이게 착하게 보이려는 것과 겸손은 약간 다르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그냥 착한 거는 나 자신이 착하다고 남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고 겸손이라는 것은 내 앞에 서있는 이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해주어 그를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사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제일 잘났습니다. 세상은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우리밖에 모릅니다. 당연하죠. 내가 남이 되본적이 있을까요? 나는 이 세상에 와서 나인채로 쭉 살았습니다. 남이 되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주도 내가 있어야 존재한다는 얘기도 있는 거죠. 제가 존재하지 않으면 나에게 다른 존재라는 건 없습니다.
헌데 남을 더 존중해줘야 하고 인정해줘야 한다니 나를 세상의 중심이라 믿고 살아가게 해 준 에고(Ego)는 쉽게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이 글의 처음에 말했던 제 운전 관련 이벤트 중에 과연 제가 '겸손' 했었다면 일이 어떻게 진행이 됐을까요? 다른 운전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절대 그런 사건은 저에게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겸손이라는 게 남을 먼저 생각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궁극적으로 나를 위해서 행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가 잘나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다른 이를 위함으로써 얻는 것에 비하면 투자 대비 성능면에서는 효율이 굉장히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예의와 타인에 대한 배려는 푼돈을 투자해 목돈으로 돌려받는 것이다.
토머스 소웰
오늘도 부족한 글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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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책 '에고라는 적' 에서 발췌하여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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