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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of Think

쾌락독서(문유석 판사의 독서에 관한 이야기)

by DaybreakerForWhat 2019. 5. 8.

 문유석 판사겸 작가님의(판사와 작가를 겸하다니 부럽...) 독서에 관한 어렸을 때부터의 이야기나 여러 가지 독서 관련 생각에 관한 생각들에 대해서 재치 있고 깔끔하게 써주신 이번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중간중간 마음에 드는 글귀들에 대해서 개인적인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한번 써보고자 해서 글을 써봅니다.

 

 독서를 쾌락을 가지고 할 수가 있을까요? 좀 정적이고 안정적이며 조용한 느낌이 드는 독서와 그와는 좀 반대의 상황일것 같은 '쾌락' 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붙여놓으니 이질적인 것도 같지만 오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럼 중간중간 봤었던 얘기들에 대해서 나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10명의 학대 부모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절반은 일반적인 분노조절 요법 치료를, 나머지는 위와 같은 부모-자녀 상호작용 치료(자녀와 매일 단 5분씩만 놀아주기. 그 시간동안은 아이들에게 완전히 집중해야 한다. 부모들은 명령을 내려서도 안 되고, 비평을 해도 안 되고, 질문을 던져서도 안 된다)를 받았다.

치료 후 3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전자의 60퍼센트가 다시 아동학대를 한 반면, 후자의 20퍼센트만이 다시 아동학대를 했다.

아동학대 부모 중 상당수는 선천적인 괴물이어서 아이를 때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너 살짜리 아이들의 행동 패턴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이 교육 방법에 대해 무지했다. 제대로 상호작용을 하는 법을 교육받자 그들 중 80퍼센트가 아동학대를 멈추었다.

>>> 저도 가끔 아이와 놀아주면서 뭔가 부글부글한것이 내 안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내가 이러니 엄마는 오죽하랴마는 와이프가 아이에게 소리치는 것을 보고 있을 때는 왠지 아이에게 미안합니다)

곧 나도 한번씩 아이에게 훈육을 하게 되는데, 저번엔 아이에게 뭐라고 했을 때 아이가 울먹이면서 엄마를 찾아가더라고요. 지금 이 글을 보니 나도 참 아이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너무 무심했던 듯합니다.

우리 아이가 그 행동을 했을 때 무엇인가 생각이 있었을 텐데 그 상황 자체에 대해서 너무 뭐라고 하지 않았나 혼자 반성하게 됩니다. 그러고 앞으로 아이와 놀아줄 때는 웬만하면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아무거나 막 하도록 두는 건 아니지만 자기 주도적으로 놀이를 끌고 갈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자꾸 해주려 한다면 무엇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건 우리가 그냥 이렇게 놀아라 라고 강요하는 꼴만 되지 않을까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장난감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한 인간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더욱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악인들의 계획적으로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선한 보통 사람들이, 아무런 악의도 없이, 아니 오히려 정의감으로 용기 있게 나서서, 결과적으로는 무고한 타인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이 파멸로 몰아넣기도 하는 것이다.

 

>>> 이 글을 읽고 갑자기 무서워졌습니다. 내 선의가 내 정의감이(사실 정의롭지는 않기에 이건 걱정이 되진 않지만...) 의도하지 않은 악행이 되어 다른 이에게 안 좋은 상황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말이기에 한 번도 그런 방향으로는 생각해본 적 없는 저로서는 약간 놀랐습니다.

 

" 그럴...수도..있...겠네?? "

 

라고 책을 보다가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오면서 그런 일을 무엇이 있었을까요? 잘해준다고 너무 챙겨주는 것도 부담이지 않았을까요? 이게 악행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선행이라고 생각하였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악행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드는 순간이군요.

 

" 그럴...수도..있...겠네?? "

 

 그럴 수도 있겠네 하면서 그냥 넘어가버렸지만 하여튼 내가 하는 행동, 혹은 할 행동에 대해서 실행 전에 한번 더 생각해보는 과정을 거쳐야겠습니다. 

다른 이에게 잘되라고 하는 행동이라고 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주로 가족이나 친구에게 그렇게 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 등을 잘 고려해가며 FACT를 얘기해야지, FACT라고 생각하는 것을 얘기하면 안 된다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 에서처럼 유죄의 예단을 갖고 몰아가면 목격자는 물론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본인조차 자신의 기억에 자신이 없어진다.

>>> 내가 어제 무엇을 했는가는 아주 쉽게(아니다.. 사실 쉽지 않다 왜 어제 일도 기억이 잘 안나지?) 생각해낼 수 있습니다. 근데 일주일 전에 뭘 했는지는 떠 올리기가 그다지 쉽지가 않습니다. 기억이 난다고 해도 그게 확실한 것인지는 나조차 확신이 가지 않습니다. 근데 그때 누군가가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면 괜히 발끈해서 내가 만들어낸(?) 진실 혹은 거짓 기억을 조작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확신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듯합니다.

일주일 전조차 이럴진대 1년 10년 전일을 다시 기억해낸다는 건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것이 다른 이와 연관된 일이나 사건이라면 더욱더 왜곡이 더 많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기억을 조작해서 일을 꾸밀 수 있는 일도 있겠다 싶습니다. 정확한 사례를 들 수는 없지만 남의 기억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내고 그걸 믿게 만든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나의 기억을 조심하자.

 

특히 조심할 것은 위의 두 가지 문장들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의감을 기반으로 두고 있는 기억은 남을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빠트릴 수도 있다는 것.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대다수의 인간은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대안은 기본소득제 정도. 그런데 기본소득이란 말 그대로 기본적인 출발점에 불과한 것 아닌가.

>>> 요즘 들어서 가끔 드는 생각은

 

"기본소득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건데, 자본가가 물건을 생산하는 데는 인력(노동력)이 필요하죠.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나 서비스적인 형태로 제공이 되고 그것을 구매자들이 소비하면서 돈이 순환하는 것이고 또 사람들은 그것들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죠.

여기서 노동력이 인간의 활동에서 인공지능, 로봇으로 대체가 된다면 아니 된다면이 아니고 돼겠죠. 산업 혁명에서 이미 기계로의 물리적 노동력 이동은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대체돼가고 있고 이제 정신적인 노동까지도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아무리 막는다고 (러다이트 운동처럼 인공지능을 아무리 때려 부셔 봤자) 변해가는 시대를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그럼 노동자는 어디서 소득을 얻어서 자본가가 만드는 가치적 형태를 구매할 수가 있을까요? 또 자본가는 그걸 왜 만드는 것일까요? 이것부터가 자본주의의 기본 틀에서 벗어나버리게 되는데 자본주의를 버리지 않는 이상(버려지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네요) 바뀌지 않는 이상은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누가 유지하고 싶어 할까요? 그게 누군지 알면 이 상황이 쉽게 버려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이 드네요) 돈을 주고서라도 지금의 사이클을 유지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미래를 바꾸는 방법은 현재의 사회부터 바꾸는 것이다.

>>> 미래는 현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재를 바꾸지 않는다면 미래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거겠죠. 현재가 그대로 계속된다면 내 미래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변해가는데 내가 바뀌지 않는 상황, 그 괴리감에서 오는 고통은 상당할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것으로 인한 소외감, 도태감, 이질감 등으로 점점 낙오할 수도 있고요. 그렇다면 변해야 하겠죠?. 근데 사실 아직 저는 어떻게 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하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변한다는 것인지 아직 뭔가 눈에 보이도록 잡히는 게 없는 현실입니다. 사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책을 보면서 내 생각들을 주저리주저리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마치 불투명한 유리 밖으로 뭔가가 보이는 것 같긴 한데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라는 느낌 정도라고 설명할 수 있겠네요.

 

우리의 이 불투명한 유리를 어떻게 투명한 유리로 만들 수 있을까요?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한다.

>>> 행복을 타격에 비유한다면 아주 강한 행복감을 한 대 맞는다고 해서 그게 얼마나 오래갈까요?

대신 아주 짧게 짧게 단타라도 그 행복이 찾아오는 빈도수가 잦다면 이것은 어떨까요?

 저는 행복을 얼마나 강하게 느꼈는가 보다는 얼마나 자주 느끼냐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글에 공감이 됩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짧은 행복을 어디서 느껴야 하는지 '가족' 외에는 (가족도 가끔 날 안행복!! 하게 하지만) 찾을 수가 없는 건지 내가 못 보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행복은 자주 맞을수록 좋은 거겠죠?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그저 인내 하나 배우러 오는 것 같다"

>>> '인내' 맞는 말인 거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인내를 배우고 있는 중이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배우고 있을 것입니다. 배고프지만 참는 인내, 일이 밀어닥치는 순간을 버티는 인내, 뭐라고 한마디 들으면 삭히는 인내, 내 말을 더럽게 안 들어도 참는 인내, 다 사고 싶지만 지갑을 닫는 인내, 유튜브를 보고 싶지만 책 보는 인내 등등 순간순간이 뭔가를 참아내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요즘 들어서는 더욱더 인내를 많이 발휘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니면 세상을 배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네요. 회사건 집이건 운전하는 도로에서건 인내를 잘 만들어 내지 못하면 원치 않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인내만을 해야 능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무언가를 참고 견디는 경험을 통해서 자기 통제력을 만들게 된다면 그 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그래도 예전보다는 능수능란하게 넘길 수 있는 능력이 생길 수 있을 때가 온다는 것 그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인내를 배우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은 책 '쾌락독서'의 내용을 발췌하여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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