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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of Think

신영복 선생의 《담론》- 돌베게

by DaybreakerForWhat 2019. 8. 28.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이라는 책은 초반 부분에서 부터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를 못했습니다. 받아쓰기하듯이 필사를 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았습니다. 특히 '공부'라는 것과 고전에 대한 공부를 말하는 부분에서는 저의 새벽 독서시간을 모두 사용한 것 같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고, 비록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지만 새 책으로 구매를 해서라도 간직하며 두고두고 볼 책으로 곁에 두어야겠습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므로 혹시 책을 보시겠다는 분이 있다면 조심스럽게 권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 시대에 한자가 자주 보이는 책은 조금 부담도 되고 꺼려지기도 하지만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 내용에 대한 의미만으로도 그런 것들은 상쇄하고도 남았습니다.



<고전>

공부(工夫)의 의미?

'공'의 한자어 '工' 은 '천天'과 '지地'를 연결하는 뜻이라고 한다. '부夫'는 한자의 모양을 보면 사람 인'人'이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주체로 자리 잡고 있다. 결국엔 공부란 천지를 사람이 연결하는 것이다. 과거의 공부의 뜻으로 현대의 '연결', '공유'과 같은 단어의 의미와 관련지어서 보자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결국엔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것도 공부를 통해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기에 연결과 공유를 통해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신영복의 공부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란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공부입니다. 자연, 사회,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세계 인식과 자기 성찰이 공부입니다."

이 대목에서 이 책을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부라는 것에 대한 평소 내가 가진 참된 의미라고 어렴풋이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명료하게 정리를 해주는 저자는 처음이라 생각했다. 

공부라는 것은 꼭 책상에 앉아서 하는 그 공부가 아니다. 모든 생명체의 존재 그 자체가 공부이다. 공부는 고생이라고 한다. 고생을 해서 진리를 찾게 된다는 얘기이다. 이것은 인간만이 거치는 과정이 아니고 그 과정에도 끝이 없다. 하물며 모기도 사람의 피를 먹어서 생명 그 자체를 이어가야 하지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공부이다. 비바람을 겪고 헤쳐 나오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이치에 대해 조금씩이라도 이해를 해 나가는 것이다.

삼독三讀

"모든 고전 공부는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 그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독자 자신을 읽는 삼독이어야 합니다."

공부를 하는 것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흘러가는 순서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텍스트를 머리로 이해하고 그것을 토대로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들을 발로서 창조적 실천을 하는 게 삼독을 하는 과정과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영상 미디어가 대세라지만...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공부의 목적이며 그것을 행하는 주체도 사람이다. 영상을 보는 것은 세계를 전달하는데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사실 이보다 쉬운, 아예 개념 조차 모르는, 본 적도 없는 것을 알려주는 데는 탁월하고 직접적인 방식이다. 

나는 가끔 4살 짜리 아이에게 유튜브를 통해서 많은 동물들을 보여준다. 요즘 아이들은 유튜브를 보면서 세상을 배운다고도 한다. 고릴라에 대해 사전적 의미가 어떻고 어떤 지역에 살고 뭘 먹고 이런 걸 설명할 필요 없이 그냥 영상을 보여주면, 아이는 손쉽게 모든 정보를 직관적으로 습득하고 배우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세상을 인식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근데 뭔가 빠진 게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바로 주체가 누구냐이다. 신영복 선생은 공부란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토대로 창조적 실천을 행하는 것이라 했다. 머리를 통해 이해를 하고 가슴으로 공감하고 느끼며 발로써 그것을 체험하고 경험하여 자신도, 세상도 변화시키는 게 궁극적 목표라 했다.

하지만 영상 미디어 만으로는 '발'이 빠진다. 뭔가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이다. 알긴 하지만 진정한 앎은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문사철의 추상력, 시서화악의 상상력과 영상서사의 전달력을 통해 인식 주체의 소외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

문제를 옳게 제시하는 힘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나도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어서 일반 사회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곤 한다. 조직에서 업무를 보는데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면 누구나 그것을 표면화하게 된다. 이때, 문제는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냐는 것이다.

나는 가끔 "말 짧게 해" , "핵심이 뭐냐"라는 말을 듣곤 한다. 내 딴에는 지금 발생한 문제가 여러 가지 사연들과 서로 물고 물려있기 때문에 설명한다고 한 건데 이런 얘기를 들을 때는 서운하기도 하고 직장 상사가 미울 때도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괴로운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남의 말을 듣는 데 있어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고 싶지 않아 한다. '경청'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말하는가?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렇다면 말하는 내가 핵심을 잘 파악해서 상대방에게 그림이 그려지는 듯한 짧은 핵심 단어와 문장을 사용해 끝내줘야 한다. 

저자는 이것을 기르는 과정에 추상력과 상상력을 중요시 말한다. 문제를 옳게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반은 해결하고 들어간다고 한다.  추상은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압축하는 것이고,  상상력은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을 읽어내는 것이다. 

추상력은 이성 훈련 공부인 문사철(文史哲)을 통해서 상상력은 시서화(詩書畫)를 통한 감성 훈련을 거치며 배울 수 있다. 특히 어느 시대에나 인류학 적으로 작지 않은 성과를 이룬 사람들은 예술과 미술 등의 활동도 겸해서 하고 있었다고 하니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주역에서 발견하는 최고의 '관계론' 4가지

성찰, 겸손, 절제, 미완성 이 네 가지를 가장 큰 덕목으로 얘기한다.

'성찰'은 자기중심이 아니며 시각을 외부에 두고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고 뒤에 세우고, 자기의 존재를 상대화하여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배치하는 것이다.
'절제'는 자신을 작게 가지는 것이다. 주장을 자제하고, 욕망을 자제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미완성'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완성이 없다면 과정밖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4가지 중에 가장 큰 덕목은 '겸손'이다.

겸손은 주역에서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데 '군자의 완성'이라고 까지 칭할 정도다.


"겸손은 높이 있을 때는 빛나고, 낮은 곳에 처할 때에도 사람들이 함부로 넘지 못한다."

청출어람보다는 부자 제자?

'논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를 정리한 공자 사후 만들어진 인류의 귀중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살아있을 때는 없었기 때문에 그 후에 제자들이 만들었다는 게 통설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자로, 안회 처럼 공자를 마지막까지 모신 제자들도 있는가 하면 자공(子貢)이라고 있다. 자공은 그 당시에 상당한 부를 가지고 있던 대상인이었다. 그 범위가 공자의 행적이 닿는 곳이면 어디에나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공자 사후에 자공은 사재를 털어 공자의 유지를 이어받는 학단을 유지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게 논어라는 것입니다. 일찍이 사마천이 이렇게 얘기한다.

"뛰어난 제자를 갖기보다는 자공 같은 부자 제자를 두어야 대학자가 된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를 개인의 이익이 아닌 인류의 학문적 발전에 기부를 했다는 것에 존경스럽지가 않을 수 없다.

화동和同 담론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하고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한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화和는 조화됨, 응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동同은 같이하다, 모이다라는 뜻이 있다. 기원전 1,100년경에 세워진 周나라가 혼란의 시대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든 건 그 후로 400년경 뒤이다. 

이것을 화동和同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얘기하자면, 이 춘추와 전국의 시대에는 동同이라는 개념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동(모이다)하는 게 아니고 타의적으로 모이게 돼버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패권주의의 시대였다. 강한 자는 힘의 논리로 약한 자를 흡수한다는 개념을 자연적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고 무자비하게 먹고 먹히는 시대였다.

이 당시에 공자가 가지고 있던 사상 즉, 유가 학파의 정치사상이 화동 담론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패권 국가들의 제후들에게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한 사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자도 긴 유랑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그건 자의적일 수도 타의적일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불과 14년 만에 패망하게 되는 것을 보면 동同의 논리만으로는 지속적 결속이 아닌 단기적 형태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보자면 전쟁을 통한 무조건적 굴복시키기가 아닌 여기서 화和를 추가해야 한다. 

조화롭게 응하고 모여서 서로 담론을 통해서 패도가 아닌 왕도정치를 가능하게 해야만이 지속적인 평화적 공동체 유지가 가능한 것이다. 

<인간>

전기고문

 저자는 1968년에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게 된다. 그는 전기고문을 당하다 쓰러진 적이 있다고 하는데, 정신이 혼미하게 드는 찰나에 취조를 하던 사람이 의무실에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저자는 자신에 대한 문제 때문에 전화를 한 것이라 생각했으나 취소관의 입에서 나왔던 대화의 내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침에 부탁했던 우리 아이 감기약을 퇴근 전에 내 책상에 가져다 놔달라'라는 것이었다. 이때에 취조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취조를 하는 것은 자신의 업무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직장에서 나의 직책에 맡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대충 하든, 최선을 다 하든 우리는 맡은 바 소임을 다 하게 되어있다. 인간은 원래 그럴 것이다. 
또한 그는 한 딸아이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로서 자식이 아프면 그에 대한 합당한 조치를 취해주는 것도 맞는 것이다. 

 자신의 업무를 위해서 잔악한 전기고문을 남의 아들한테 하면서 자기의 딸을 위한 약을 챙긴다는 게 굉장히 모순적으로 다가왔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양심의 문제는 아닌 거 같다. 양심으로 먹고사는 게 아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 아닐까? 그것이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지 사람의 안에 내재되어 있는 DNA가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그는 생존을 위해서는 아주 잘하고 있었던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고문을 받고 있던 저자는 그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상태였다. 감기가 걸려서 몸이 아픈 그의 딸도 '생존'에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일 수 있다. 처해있는 근본 상태는 다르지 않다. 둘 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조치를 취하는 한 명의 인간을 통해서 사람이라는 존재가 같은 상황에 얼마나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있는지는 무엇을 가지고 설명을 해야 할까?

이기심인가? 단순히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생명에 대한 책임감인가? 아니면 그 책임감을 만드는 그의 DNA가 둘을 구분 짓는 서로 다른 경로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는 이타심이란 없고 가족이기주의만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이것을 쉽게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타심도 분명히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악마가 아니고서야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예전 독일의 히틀러 수하에 있던 수많은 독일 장병들도 이타심이나 양심이란 것은 있지만 자신이 사회적으로 받았던 역할에 대해서 인간이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생존'이 위협받게 되는 것이고, 소위 '대세'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어느 시대에나 이러한 일들은 발생되기 마련이고 그것을 좋다 나쁘다 평가하기에는 나 또한 인간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지붕과 주춧돌

 혹시 집을 그림으로 그릴 때 무엇부터 그리는가? 나는 주로 지붕부터 그린다. 그렇게 해봤기 때문에 그렇게만 해오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미술가도 아니지만 가끔 아이에게 집을 그려줄 때면 지붕을 항상 먼저 그리게 된다. 저자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 있을 때 이런 사람을 만났다. 사회의 기술자, 목수의 직업을 가지고 있던 수감자였다. 

어느 날 그 수감자는 자신의 왕년의 목수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집을 그리게 되었다. 근데 저자가 보기에 좀 신기한 장면이었던가보다. 목수는 남들처럼 지붕을 먼저 그리는 게 아닌 주춧돌을 먼저 그리는 게 아닌가? 거기서 저자는 

'일하는 사람은 집 그리는 순서와 집 짓는 순서가 같구나. 그런데 책을 통해서 생각을 키워 온 나는 지붕부터 그리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것이 하나의 다양성이라고 한다. 지붕을 먼저 그리던, 목수처럼 주춧돌을 먼저 그리던, 창문을 그리든 간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살아오는 각각의 주체들이 있다. 여기서 나의 생각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존중하며, 존중만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그렇다면 나와는 왜 다른지, 다른 점을 받아들여 볼 수는 있는지 깊게 고민해보며 가장 중요한 요점인 변화를 이뤄야 한다.

내가 달라지는 것이다. 항상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 발을 가지고 이곳에도 가보고 저곳에도 가봐야 한다. 그래야만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리한 것을 받아들여 자기 변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가슴으로부터 발로...

 배우고 익히고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공감하며 느낀 후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궁극적인 공부의 목표인 자기 변화를 이루지 못한다. 신영복 선생은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된다고 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책을 아무리 읽는다고 자기 변화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말과 같다. 책을 통해서 그 생각을 익히고 그 생각이 나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사유가 생기면 그것으로 그만이 아닌 내가 배운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최종적인 자기 변화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가슴까지 도달해 잠재되어 있는 변화의 기운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 생각에는 관계를 먼저 만들려 하는 것보다는 끊임없는 자기비판과 성찰을 통해서 기회가 지나갈 때 멈춰 세울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관계와 인식

 우리가 사물이나 역사를 인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내가 맺는 관계이다. 왜 그럴까?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는 '관계없음'으로 봐야 한다. A가 B를 잘 알기 위해서는 B가 A를 잘 알아야 한다. 잘 안다는 게 무엇일까? 그것은 '관계'이다. 애정이 있어야 사람과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관계는 애정이다. 애정이 있어야 초기의 관심도 갖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풀은 모두 이름이 있다. 잡초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에는 잡초가 있다. 이유는 그것과 나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특정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풀들은 크던 작던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을 사서 먹던 뜯어서, 내가 바라보건 안 바라보건 그것을 알기에 내가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잡초를 뜯어먹거나 지긋이 바라보고 있지는 않는다. 애정조차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돈을 벌려고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 팔거나 서비스를 판매한다. 하지만 여기서 '돈'에 대한 인식만으로 가지고 '돈'과의 관계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지불하는 사람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관계를 맺지 않으면 자신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돈'에 대해서도 원하는 것만큼의 소득을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모든 행위를 할 때에는 그 사물과 사람, 나와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이어갈지에 대한 고민이 우선되어야 한다.

함께 맞는 비

 동정同情이라는 것은 情이 같다(同)이라는 뜻이다. 남을 동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뜻(마음)을 같게 한다'이다. 하지만 무조건 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상대방은 상처를 입거나 오히려 거부를 할 수 있다. 동정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럴 때는 동정을 다른 방향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책에서 저자는 비가 온다면 가지고 있던 우산을 씌어주지 말고 자신의 우산을 접고 옆에서 같이 비를 맞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얘기만 들었을 때는 "아니 왜 멀쩡한 우산을 가지고 같이 쓰면 비도 안 맞고 상대를 위할 수도 있는데 그건 둘 다 바보 아닌가?"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상대를 위하는 마음은 득이 하나 더 있네 없네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과 같은 상황, 감정, 생각을 동일시해볼 수 있게 나 자신을 만듦으로써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는, 나만이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그쪽에서도 나의 의외의 모습에 동정이 생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식이자 방향이다.

신영복 선생의 '함께 맞는 비'


오늘도 부족한 글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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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책 '담론에서 발췌하여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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