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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of Think/인문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 모두를 위한《오십, 중용이 필요한 시간》신정근 지음 - 21세기북스

by DaybreakerForWhat 2020. 1. 9.

 저는 아직 나이가 오십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십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기는 합니다. 나이라는 것도 무슨 가속도의 법칙이 적용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상하게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각 나이마다 부르는 용어가 있죠.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기초를 세우는 나이인 30세와 사물의 이치를 알게되고 주변의 소음에 쉽게 동요하지 않을 40세 불혹, 그리고 하늘의 명을 아는 나이인 50세인 지천명이라고 하죠. 나이 때마다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쉽지 않은 이야기네요.

이번 책에서는 고전 사서라고 불리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중에서 '중용'에 관한 이야기를 신정근 저자가 쉽게 풀어주고 우리 주변 경험들에 빗대어서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중용은 12세기 '주희'라는, 흔히들 부르기를 '주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쓴 게 아니고 정리한 겁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제가 책을 보면서 느낀 것들과 중용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에 대해서 아주 개인적인 견해로 써보겠습니다.


극단의 세계,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세상에서 우리는 어느 지점에 위치해야 하는걸까요? 중심이라는 것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중간'이라고만 봐야 하는 걸까요? 그럼 항상 중간만 유지하고 있으면 된다는 얘기일까요? 무엇이든 하나의 위치에만 있겠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물도 고이면 썩는 것처럼 세상 만물 어떤것이든 그 자리에 고정되어 버리면 물리적, 정신적인 부분에서 변하려고 하지 않는 타성에 적게 될 수도 있습니다. 책의 제목이 그렇지만 나이가 오십 인 사람만이 중용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여전히 유난히 흔들리며 살아가게 되는 50대를 위한 마음의 중심 잡기에 대해서 '중용'이 특히 필요한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중용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지혜와 통찰은 무엇일까요?

극단(極端)

 모 아니면 도라는 말도 있듯이 요즘 세상은 점점 자신만의 주장을 관철시키며 반대편의 입장에 대해서는 부정하려고만 하는 듯 합니다. 좌우로 나뉘는 정치부터 시작해서 편 가르기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라고 할 수 있죠. 오히려 어느 한쪽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집단들은 자신들 쪽으로 오라고 손짓합니다. 스스로 그리해서 좌우가 된건지 다른 이에 의해서 어쩔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를 일입니다. 책의 1강에서는 이와 같이 '중용'을 통해서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는 점점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기분입니다. 꼭 경제적인 부분에서만 양극화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 극으로 치달으려는 분위기가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간에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로, 우리가 돈을 벌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를 바르게 두고 정하지 않으며 무언가를 무조건 쫓으면 극으로 갈때까지 자신이 무얼 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맹목적으로 목표만을 쫓을 뿐입니다. 세상일이 모두 뜻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중간중간 쓰러지며 좌절하는 시기도 옵니다. 

"내가 이것을 하려던 이유가 왜 였을까?"를 이때 돌이켜봐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극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이유라면 성공한다 해도 언젠가는 다른 곳에서 피해를 입게 됩니다. 해서 제가 처음에 말한 '돈을 왜 벌려고 하는지'가 '좋은 집에 살기 위해, 좋은 차를 타고 뽐내기 위해'가 아니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더 큰 가치를 봐야 합니다. 넓게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 세계의 빈민을 구하기 위해'라는 거창한 뜻이 아니여도 됩니다. 이것도 어찌 보면 극단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돈이 정말 필요한 이유는 '살아가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봐야 나중에 그것을 이뤘을 때 허탈감과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또다시 다른 것을 잘못된 이유를 가지고 시작하게 됩니다.

행을 근본에 두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중용의 덕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행험요행(行險徼幸)

'자기주도적인 군자는 지금의 자리를 본래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것의  바깥을 자기 것으로 바라지 않는다.'

 중용에서는 '내'가 처한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내용도 다루고 있습니다. 제 경험을 빗대어서 말해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정말 직장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더 이상 자신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하루하루가 매우 힘들 겁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지금 자신의 상황에 굉장히 만족하고 상당히 흥분되어 있는 상태라면 어떨까요? 이 두경우 전부 상황에 압도되어 자신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항상 좋다고 해서 좋기만 한 기분만 만끽하다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더 안 좋은 상황으로 역행할 수가 있습니다. 

책에서는 좋든 싫든 그 상황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중용을 지킨다면, 자신을 조금씩 가꾸며 인생을 살찌워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으려 하는 '평범'을 아는 것, 이것이 중용의 또 다른 의미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발각(發覺)

'우리는 다른 사람이 모르니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접근할 수 없지만 나 자신은 접근 가능하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혼자서 또렷하게 알고 있다.'

우리는 가끔 보이지도, 들리지 않는다 하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떳떳하지 않은 행동을 합니다. 하지만 지금 누가 보고 있는가를 나는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바꿔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란 성립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항상 내가 나를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손쉽게 그릇된 행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자기 통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곤란(困難)

'그들은 한번 전쟁에 나가 큰 공을 세우면 벼락 출세할 수 있는 시운을 잡으려고 했다. 이러한 시운에 비해 매일매일 비슷한 평범한 일상은 매력도 없고 흥미도 없었다. 벼락출세를 가능하게 하는 극단의 삶을 동경한 일반 서민은 더 위험하지만 더 큰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몰려들었다. 극단의 광풍이 불기 시작하자 일반 서민은 광풍에 뒤처질까 염려할 뿐 그 밑에 도사린 위험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사태를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라고 주문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중용대로 사는 게 바람직하지만 지속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상황을 목격한 공자는 평범한 가치를 담고 있는 중용대로 살자고 제안하는 게 일반 서민에게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는 이것이 현재 ''에 관련된 일과 역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글에서 '출세'는 왜 하려고 했을까요? 잘 살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몇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욕망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도 비슷한 맥락의 흐름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누군가 아파트를 사서 금전적으로 크게 이익을 보았다는 이야기들이 스멀스멀 들리면 너도나도 부동산 투기 열풍이 몰아칩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비트코인' 광풍은 또 어땠나요? 1을 넣어서 10이 만들어지는 마법과도 같은 허상들이 많은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 춤을 추다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들었지요.

주식이라는 것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던 초반에는 이와 같은 바람이 역시나 되풀이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반복됩니다.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같은 사람이 수백 년, 수천 년을 사는 것이 아니기에 처음 세상에서 접하는 일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기에 이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비록 '중용'의 평범한 가치대로만 살아가기에는 '나'를 가만 놔두려 하지 않는 세상에 '나'는 너무 길들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중용'의 삶을 놓쳤다 하여도 다시 잡고 그 길을 걸으며 길을 벗어나면 다시 돌아와서 자리 잡으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중용'의 불식즉구(不息則久)와 같은 '그만두지 않으면 오래간다'라는 말처럼 말이죠.

중단(中斷)

반도이폐(半途而廢) : 중간쯤에 이르러 주저 않다.

'중간에 그만두면 지레 포기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된다. 아울러 먼저 그만둔 사람으로 인해 또 다른 기권자가 나올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먼저 그만둔 사람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사람처럼 죄인 취급을 당하게 된다. '너 때문에 다른 사람도 덩달아서 그만둔다'며 비난의 화살을 받게 된다.'

 그만두는 게 대체 왜 문제일까요? 완주와 완성만이 미덕일까요? 저는 책을 보다 보면 끝까지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책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책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보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완독을 바라는 제 마음 때문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욕심입니다.

하지만 책을 '왜' 보는지에 대해 잘 정의해 보면 '그만'둘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A를 '그만'두게 된다고 '나는 끝까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 B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건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의 차이지요.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그렇습니다. 퇴사 의사를 밝히고 퇴사 전까지는 인수인계 등의 문제로 주변에서 '쟤는 곧 나갈 사람'이라는 낙인 아닌 낙인이 살며시 찍히게 됩니다.(요즘은 이런 분위기가 좀 덜할까요) 물론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완주하지 못하고 퇴사하는 사람이 잘못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곳에서 혼자 빠져나가려는 사람을 보며 손가락질하는 이가 잘못인가요? 자기주도적 군자라는 말을 책에서 자주 보았습니다. 퇴사를 하는 이는 자기주도적 삶을 사는 것이며, 계속 회사를 다니는 이도 같은 삶을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퇴사자가 남의 눈치를 보거나 남는 자가 퇴사자를 비난하는 것은 전혀 '자기주도적 삶'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당당하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얘기를 '중용'에서는 넌지시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두고 안 그만두고 가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내가 선택했다면 그게 맞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일의 목표와 방향은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려는 것입니다. 맞고 틀린 것은 남이 볼 때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면 그 자체로 온전히 맞는 것이고 바른 것입니다.

상보(相補) 

'말을 할 때 어떻게 행동할지 살펴보고 행동할 때 말과 호응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달리 나타내면 말은 행실이 따라올 수 있을지 고려하고, 행실은 말이 책임질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말할 때 말만 고려하지 않고 동시에 행동도 검토하고, 행동할 때 행동만 고려하지 않고 동시에 말도 검토하는 것이다. 말과 행동을 따로따로 살피지 않고 늘 같이 살필 때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나온 이야기대로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습니다. '신중'이 필요했습니다. 가벼우면 안 되고 너무 빨라도 안됐습니다. 말과 행동을 함에 있어서 신중해야 합니다. 내가 이 말을 실천할 수 있을까? 나는 이 행동을 내가 뱉어냈던 언어와 일치하게 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일단 앞뒤 생각 없이 말도 나오는 대로 행동도 나오는대로 그때그때 다르게 한다면 누가 나를 '신뢰'하겠습니까? 나는 나를 믿을 수 있을까요? 악순환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말과 행동은 깊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중심(中心) 

마음 근육의 중심잡기

 마음에도 몸처럼 근육이 있습니다. 몸의 근육은 우리가 활동하는 데 있어서 기본 같은 것입니다. 이 기본에서 시작해서 더 크고 강하게 몸을 단련하는 게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근육을 사거나, 어디서 줏어다가 우리 몸에다 라면 사리 추가하듯이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의학적인 도움을 받는 것도 좀 아닌 듯합니다.

몸에 근육을 추가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노력을 요합니다. 평소에 기초 근육이 받고 있던 부하보다도 더 강한 강도의 무게를 버티고 이기려는 행위를 반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극을 받은 근육은 미세한 상처들을 입고 그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전보다 큰 근육을 얻게 되는 겁니다.

마음의 근육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기본은 마음에도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지만 그 '힘듬의 과정',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에 반하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중용을 통한 그것이 마음의 중심을 조금씩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중용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중 : 기울어지지도 치우치지도 않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상태.
용 : 늘 있는 평범한 일상.


《오십, 중용이 필요한 시간》의 제목에서 처럼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인 50대에게 권하는 책처럼 보입니다. 사실 지천명이라 하면 하늘이 정한 뜻을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요즘 같이 빠르게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서는 어떤 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인지 한계는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은 쉰 살이나 그 외의 나이 때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천명의 나이인 오십 대와 꼭 그 나이가 아니더라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마음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 이 책을 통해 '중용'의 뜻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이나 지인들에게 선물하기에도 괜찮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부족한 글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이 되신다면 공유와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출처 - YES24

이 글은 책 '오십, 중용이 필요한 시간' 에서 발췌하여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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